torso 07


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0. 화가 이윤성(1985-)은, 망가/아니메 문화의 어떤 특성을 필터/스킨으로 삼아 서구 고전 회화의 주제를 하나하나 탐구해나간다.

1-1. 중앙대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한 작가의 득의작(得意作)은, (졸업전 출품용으로 준비한) <앳더래스트저질먼트(at the last jujilment)>(2010)다. 높이가 3m 80cm, 폭이 2m 90cm에 이르는 이 대작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걸작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Il Giudizio Universale)>(1536-1541)을 망가/아니메 양식의 디지털 회화로 번안한 창작물이다.

1-2. 도상학적 기본 구조는 원전을 따랐지만, 작업의 세부를 살펴보면, 원전과는 영판 다른 경우가 많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지옥 불 위로 피어오르는 쾌락의 열기/연무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과 함께 분출-확산하는 체액의 이미지, 그리고 화면 속의 주요 인물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 전환된 경우가 많다는 것.

예를 들어, 심각한 표정으로 제 몸통에서 벗겨낸 가죽을 손에 들고 섰던 바르톨로뮤 성인은, 제 가죽을 손에 든 채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 미녀로 대체됐다. 반면, 눈을 부릅뜬 채 천국의 열쇠―황금열쇠와 은열쇠는 각각 잠그고 여는 권능을 상징한다―를 들고 섰던 베드로 성인은, 은열쇠를 손에 쥔 채 황금열쇠를 마치 바나나 보트처럼 타고 앉은 철없는 표정의 녹발(綠髮) 미녀로 바뀌었다.

모든 선행의 책(작은 쪽)을 펼쳐든 대천사 미카엘을 위시하며,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죄인의 이름을 망라한 악행의 책(큰 쪽)을 펼쳐들고, 모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도록 들깨우는 트럼펫을 불며, 최후의 날이 왔음을 알리던 한 무리의 천사들은, 역시 미녀 군단의 형상으로 교체·제시됐는데, 모든 선행의 책은 핑크색 화면을 띄운 아이패드 크기의 태블릿(성애적 삶의 책?)으로, 모든 악행의 책은 청색 화면을 띄운 소형 TV 크기의 태블릿(금욕적 삶의 책?)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의 형상 그대로다. 다소 당황한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발을 크게 내딛는 그의 모습은, 이제 막 성에 눈 뜬 소년의 모습 같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마리아는 성모(聖母)라기보다는, 성애와 육체적 아름다움의 화신인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모습(풍성하다 못해 화면을 가득 메운 구름으로 이어지는 듯한 모발은 보랏빛)이다. […]

1-3. 2011년의 작업 메모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의 망가적 재구성”에서 화가는, ‘서양 고전 회화를 차용하는 것이 처음엔 단순한 반항이었을지 몰라도, 점차 과거 대가들의 예술 의지를 엿볼 수 있게 됐고, 그것을 하나씩 짚어나가고 싶다’며, 제 남상(濫觴)하는 작의(作意)를 밝혔다. 즉, 패러디나 오마주와는 다른 차원의, 꽤 야심찬 참조적 창작을 추구한다는 뜻이었다.

2-0. 2011년엔 <라오콘> <유디트> <토르소> <크로노스> <피에타> <메두사> 등을 제작했는데, <유디트>에서 목이 잘린 남자를 제외하면, 모두 이른바 ‘모에 미소녀’다. 그러한 전치를 시도한 이유, 그리고 그 의미화의 맥락을, <크로노스>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2-1. 이윤성의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로마 시대의 이름은 사투르누스)가 사랑의 신인 에로스를 잡아먹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그 회화 양식이 역시 망가/아니메풍이다. 이 작품이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그림은, 고야(Francisco de Goya)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 Devouring His Son, Saturno devorando a su hijo)>(1821-1823)로, 제 자식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시간의 신이 아들 한 놈을 통째로 뜯어먹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번엔, 주제만 동일할 뿐으로, 도상학적 기본 구조부터 상이하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이자,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 혹은 사투르누스는, 시간의 신답게 모래시계를 제 상징으로 삼는다. 하지만, 낫으로 제 아버지를 거세해 살해하고 잘린 성기를 바다에 던진 탓에, 섬뜩한 낫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른손에 시계태엽 장치로 작동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왼손으론 사지가 잘려나간 꼴로 죽임을 당한 에로스의 머리를 쥔 채, 피와 내장 기관과 별이 가득한 상상계로 날아오르는 크로노스를 포착한 이윤성의 그림은, 뜨거웠던 사랑마저 좌절시키고 마는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한탄하는 우의적 작품이 된다.

2-2. 하지만, 이윤성의 그림에서 크로노스는 여자다. 그것도 미소녀다. 살해 장면을 그렸지만, 전반적인 인상은 안온하고 귀엽고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이는 ‘모에화(모에카[萌え化])’ 혹은 ‘모에 의인화’를 예술적으로 변용한 결과다.

‘싹트다/타오르다’는 뜻의 오타쿠(オタク: 망가·아니메 따위에 과도하게 열중하고 집착하는 사람) 신어인 ‘모에(萌え)’는, 1차적으로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제 ‘모에’의 의미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단순한 취향이나 성적 페티시 이상의 뜻이 됐다. 심지어 지하철 노선이나 편의점, 기업 브랜드 등을 ‘모에 의인화’해 미소녀나 미소년으로 전치시키는 일도 허다하다.

이윤성의 <크로노스>가 오타쿠 문화에서 숭앙되는 미소녀의 일반적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은,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현대의 청년 하위문화에 맞춰 새롭게 갱신하겠다는 화가의 뜻을 드러내는 것으로 뵌다. (크로노스를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켰으니, 작가가 시간의 신에게 일종의 거세를 행한 셈이 되기도 한다.) 주제 인물의 표현에서만 그런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살육의 장면을 귀엽게, 피와 내장 기관을 사랑스럽게 표현한 것 또한 오타쿠 문화의 ‘귀여움(카와이[可愛い])’에 대한 집착을 따랐다.

‘모에’를 “원형적인 요소들의 파편을 긁어모아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조합해 맞춰내는 방법”이라고 규정한 만화연구가 김낙호를 따르자면, 이윤성의 <크로노스>를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다룬 서구 고전 회화의 어떤 요소나 차원을 ‘모에화’의 문화적 문법에 따라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이상향을 도출해낸 그림”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2-3. 하지만 이윤성의 작업에선, 원전성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오타쿠 특유의 동인 문화에 충성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고로,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원전(들)과 그를 호출해 재조합하는 스킨의 2중 구조를 전제로 구현되는 ‘데이터베이스 소비’도, 그 전개 양상이 일반적인 오타쿠 창작물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일본산 망가/아니메를 보고 성장한 청년이지만, 그에게 ‘모에화’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현대적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는 필터로서 의의를 지닐 뿐으로, 기왕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대주제는 삶과 죽음의 순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열락(悅樂), 즉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는 큰 기쁨이다.

2-4. 오타쿠의 기호 체계에서 ‘모에 미소녀’는
소녀로 전화한 성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팔루스의 등가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 오타쿠 평론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그래서, 거대하게 확대-구현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미스 고²(Miss ko²)>―등신대의 피겨라는 이유로 섹스돌을 연상하게 되는―와 남성기 모양의 전투기로 변신하는 <두 번째 임무 고²(Second Mission Project ko² aka S·M·P ko²)>가, 오타쿠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바 있다. (비고: ‘모에’를 보는 눈을 결여한 무라카미 다카시는, 대중에게 자신을 오타쿠로 소개해왔지만, 정작 오타쿠들로부터는 오타쿠로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 진성 오타쿠 작가 미스터(Mr.)가 그려낸 미소녀들의 경우엔, 그것이 사춘기 이전의 소녀로 분장시켜놓은 작가의 성기 중심적 성욕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방할수록 더욱 부적절하다는 느낌, 즉 바라보기 민망하고 공범자가 된 듯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느낌―윤리·도덕적 판단에 의한 거부감―이 강화된다. (비고: 그 이율배반적인 면모, 미와 윤리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적 불일치가, 미스터의 예술에선 핵심이 된다.) 하지만, 이윤성의 미소녀들을 바라볼 때, 그처럼 민망하고 불유쾌한 기분을 느끼긴 어렵다. 왜일까? 이윤성의 작업에도 분명히 성적인 코드가 장치돼 있는데.

이윤성의 회화는 망가/아니메 문화의 파생물(즉, 현대 예술의 형식을 취한 2차 창작물)로 오해하기 쉽고, 특유의 ‘모에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서구 고전 회화처럼 구도와 비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바, 일단 조형적으로 아름답다. (이 시대에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회화가 드물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런데, 화가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서양 고전 회화가 구현했던 종교적 열락을 의태(mimesis)하고자 애를 쓴다.

이윤성이 그려내는 분출하는 피와 체액의 소용돌이에선 온화함이랄까, 일관하는 어떤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작가는 초기 작업 메모에서, 분출하는 피와 체액의 이미지라는 대주제에 영향을 미친 원전으로,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AKIRA, アキラ)>에서 반복되는 폭발 장면, 와츠키 노부히로의 <바람의 검심(るろうに?心 -明治?客浪漫譚-)>에 등장하는 피의 분수 등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원전에서 제시되는 숭고(sublime)와 이윤성의 그림에서 구현되는 숭고는 질이 다르다. 전자가 히스테리아(histeria)와 테리빌리타(terribilita)의 숭고라면, 후자는 아타락시아(ataraxia)의 숭고. 즉,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자의 숭고다.

3-1. 화가는 2012-2013년 다채로운 <토르소> 연작을 제작했다. 이 작업들은 초기작들과 달리 유화로 제작됐고, 만화/아니메 문법에 충실했던 디지털 작풍을 적절한 수준에서 회화적으로 변화시키는 이행 과정을 필요로 했다.

3-2. 망가/아니메의 문법에서 이상적 육체로 간주될 법한 미소녀들을 토르소의 형태로 고찰한다고는 하지만, 일단 두상을 제거하지 않은 채, 사지, 즉 팔과 다리만을 절단해 토르소로 간주하는 형식이다.

‘모에 미소녀’를 사지가 절단된 토르소의 형태로 고찰하는 이 연작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분출하는 피와 체액의 소용돌이―망가/아니메적 반짝임과 별무리를 동반하는―로, 그것이 육체의 포즈/움직임과 맞물려, 특유의 회화적 시공을 창출한다.

<토르소> 연작엔 참조한 원전이 존재하지 않지만, 어쩐지 맥락상 미켈란젤로의 <미완의 노예상(Unfinished Slaves: Schiavo morente, Schiavo giovane, Schiavo barbuto, Atlante, Schiavo che si ridesta)> 연작―열두 점을 계획했으나 미완성 상태의 다섯 점만을 제작한―을 연상케 한다. 후자가 고통 받는 노예를 그렸다고 하지만, 실상 성애적 열락을 다룬 것으로 뵈듯, 전자도 신체 절단의 하드코어한 성애적 주제를 다뤘다고는 하지만, 실제론 종교적 수준의 열락을 다룬 것으로 뵌다.

이윤성의 ‘모에 미소녀’들도 기호적으로는 소녀로 전화한 성욕에 다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선 ‘모에 미소녀’ 특유의 민망함과 불쾌감, 그리고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추론해보자면, 이윤성의 ‘모에 미소녀’들은, 화가의 성애적 시선에 봉사하는 물신이 아닐 것이다. 그는 ‘모에’를 보는 눈을 가졌지만, ‘모에 의인화’의 형식만을 차용했을 뿐으로, 미소녀를 성애의 현현으로 삼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그려내고자 하는 주제는, 남성의 성애적 시선이, 타자화한 여성 육체―고전 회화의 누드와 망가/아니메 문화의 ‘모에 미소녀’―와 여타 도상학적 전통―서양 고전 회화와 망가/아니메 문화의 관습적 화면 구성 문법―을 통해 물신화하는 과정인가?)

4. 2014년작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를 담은 이면화(dyptich)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기 천사를 담은 작은 캔버스 두 폭을 배치한 사면화(quadriptych)다.

표면적으론 (양팔이 잘리고 각각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 하나씩을 잃은)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가 주인공이다. (아기 천사들은 양팔만 잘렸다.) 하지만, 이 의사-종교화의 진짜 주인공은 인물을 포함한 피와 꽃이 하나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치는 형상, 그 자체다. <수태고지>는, 망가/아니메의 주요 장면에서 드라마틱한 국면 전환을 위해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소용돌이 구도를 회화적으로 전치-재구성한 결과로서, <토르소> 연작을 결산하는 뜻을 지녔을 테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 작업인가? 국면 전환의 에너지인가? 어느 쪽이건, <수태고지>는 제 창작의 다음 국면을 예고한다.

5. 이윤성의 첫 개인전은,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오후 6시 파주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에서 개막한다. ///

글 _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By 이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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