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완전한 공간의 대화 ’ 무의식의 세계, 공간을 통한 심리적 사유 끊임없이 펼쳐지는 하얀 나무들로 뒤덮인 숲 속, 웅장하면서도 음산함이 흐르는 건물, 그 곳에 홀로 남겨진 붉은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나를 한참을 응시하고는 사라져버린다. 나를 홀로 덩그러니 남겨둔 채. 이처럼 나의 작업에는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림 속에서 자주 반복되는 낯선 공간들은 편안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불안한 심리적 갈등을 자아내는 역설로 다가온다. 내 작업에 등장하는 ‘공간’ 과 ‘장소’들은 살아가며 내가 접해보지 못한 공간과 세계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를 상상하는 시간을 의미하며, 현실의 공간을 넘나들며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사건과 장소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일부 지워지기도 하지만, 나로 하여금 자아를 탈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현실에서의 욕망과 무의식의 간극을 표현하는 행위가 된다. 내가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나의 유일한 휴식이라고 할 수 있는 수면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실에서의 깊은 상처와 그만큼의 아픔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은 오로지 내가 눈을 감는 순간만 잠시 사라지는 듯했다. 어떤 날은 제발 감겨 있는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하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달을 때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나에게 잠이라는 무의식의 순간은 복잡한 현실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일상의 습관이 아니라 나만이 갖고 있는 어떤 ‘기억’을 ‘지워버리는’ 소중한 의식이었다. 결국 내 작업에 등장하는 공간과 소재, 사물들은 나를 둘러싼 혹은 나를 옥죄는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심리적 소통의 매개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겐 평면에 스며드는 색채이자 평면을 구성하는 관계의 집합이겠지만, 나에게 그림이란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욕망과 의식이라는 이름의 세상을 인식하는 이성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나는 그림을 통해 어제까지 알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 세계는 현실에서는 상상의 공간으로 불리지만, 분명 내가 무의식 속에서 ‘경험’한 실재 공간임을 나는 믿는다. 힘든 시대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간다. 이리저리 이어지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정작 남는 것은 극도로 불안한 외로움뿐이다. 목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결핍의 생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기연민으로 우울해 하거나 나르시시즘으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만이 남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이런 비정한 시대에 본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각하기 위해 무의식에 몸과 마음을 맡기려 한다. 비록 그것이 어디에 실존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라는 유일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무의식의 욕망이 세상과 맞부딪치는 충돌을 즐기려 한다. 누군가 내 그림이 그 충돌의 지점임을 발견해주기를, 그리하여 그 기형적인 외면과 불편한 내면을 간파해주기를 그리는 자로서 소망한다. 지금 내 그림 앞에 서 있는 당신은 의식과 무의식의 은밀한 소통이 오가는 하나의 공간에 잠시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했듯이 그 공간에서 본래의 내가 누구였는지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단순히 이미지의 서사적 구성을 읽어내고, 그것의 향기를 흡입하며 탐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탐닉하는 시간. 간혹 누군가의 그림은 내 삶을 정직하게 성찰하는 뜻밖의 시간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 예기치 못한 순간, 당신이 내 그림 앞에 있어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