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나의 작업은 주변에서 손쉽게 수집한 대상을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최초의 형상이 허물어지고 그 구조가 변해갈수록 나는 기존의 관념을 벗어난 순수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시간 속에서 물리적으로 변화한 대상은 나의 몸을 통해 화면에 담겨진다. 오랜 시간동안 손끝에서 섬세하게 구축되고 다시 또 무너지며 그려진 장면은, 맨 처음 그 대상을 바라보았을 때와 전혀 다른 광경이 된다. 나의 무의식적 번역으로 만들어진 장면은 명료한 서술이 쉽지 않다. 보는 이의 시선은 장면을 일시에 제압하지 못한 체 작품 속으로 들어가 유영하듯 옮겨 다니고, 수많은 틈 속에서 판단을 유보한다. 인식의 연속과 간단(間斷)속에서 나름의 사연을 담아 각자의 ‘서사’를 짓는다.
초기의 작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나열하여 관념에서 탈피하는 과정에 대한 것을 작업하거나 그 과정 중 주제에 부합되는 한 장면만을 선택해서 작업했다. 최근의 작업들은 그동안 수집된 오브제들의 파편을 모으고, 잇고, 경계를 흔들면서 생기는 익숙하지만 낯선 이미지를 가지고 스케일을 크게 키워 작업을 한다. 최근에 시작한 A3의 작업은 보일 듯 말 듯 프린트된 이미지를 가로세로의 선만을 사용해서 프린트 하듯이 드로잉 했다.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사각형의 틀 안에서 그리는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계들의 범람 속에서 나는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가로세로의 선으로 세밀한 형상을 다시 만들어 가면서 그러한 고민들은 더욱 더 깊어졌고 명확한 해답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기존의 그리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다르게 그리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 연구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기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러한 주제의식을 강화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들을 통해서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