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day life
박미정, 서울 디자인센터 객원연구원, 영상문화학
상이한 기호들의 만남, 황연주의 작업에서 즐길 수 있는 메타포이다. 이 기호의 대비는 무덤, 꽃 등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이미지와 초콜릿이라는 소재에서 시작된다. 이어서 죽음 앞에서 느끼는 엄숙함과 혀 끝으로 느끼는 쾌감, 이 이질적인 분위기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중첩된다. 기호의 충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한한 삶을 불멸의 그것으로 응축하려는 듯 옅고 흐린 이미지들과 단단하게 굳은 초콜릿 비누들이 공존한다. 비록 상이하게 ‘드러난’ 기호들이기는 하나 죽음을 암시하는 이미지와 비누의 물성이 ‘사라지는 것’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은유적이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덧없음이라는 바니타스(Vanitas)적 주제를 재생한다. 존재의 부재를 형상화하면서 그녀가 포착한 바니타스적 메시지는 죽음 혹은 공허함 그 자체에 있지 않다. 흑백의 이미지에 엷게 덧입혀진 핑크빛 조화(弔花)가 존재의 소멸(消滅)을 암시하는 그 장소에 소생(蘇生)의 숨을 불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시들어가는’ 꽃들은 죽음을 강화하는 장치라기보다 여전히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일종의 역설이다. 죽어가는 것 속에서 아직도 내쉬는 생명의 호흡을 느낄 때, 우리는 지금-여기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곧 사라질 저 육체와 영원의 순간에서 다시 만난다. 바니타스적 찰나가 영원의 시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찰나적인 꽃은 소멸에서 생성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시들어가는 그 순간에도 꽃의 일상(日常)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호작용은 초콜릿 비누로 옮겨간다. 달콤한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비누들의 나열은 직접 비누를 만드는 행위의 일상을 예술적 오브제로 전환한다. 베이스를 녹여 틀에 붓고 굳히는 반복적 작업에 다양하고 독특한 향과 색감, 형태가 가미되면서, 비누 만들기라는 행위의 성격이 변하는 것이다. 여기엔 삶의 필요를 위한 도구적 기술보다 사소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브리꼴뢰르(bricoleur) 의 ‘손재주’ 가 오히려 적합하다. 여성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손재주에 내재된 바로 그 창조적 능력에 작가의 시선이 머무르자 한낱 비누가 진지한 미적 대상으로 거듭난 것이다.
비록 시들어가지만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꽃과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의 리듬을 창조적 활동으로 전환시키는 ‘비누의 공예’가 다시 만나 꽃 비누를 탄생
시킨다. 꽃과 비누라는 이 낯선 기호들은 사라짐에 관한 메시지를 공동으로 소유한다. 꽃이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생을 기억하고 느끼게 하는 장치라면, 비누는 사라질 운명을 위해 창조적 열정으로 그것을 만들어가는 행위의 역설인 것이다. 이렇게 부재의 이미지에서 존재를 기억하고자 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사라짐으로 인해 살아가게 되는 생의 패러독스로 마무리된다. 결국 꽃과 초콜릿과 비누의 불분명하고 모호한 연합은 부재와 존재의 공명(共鳴)을 환기시키며 일상의 모순된 이미지를 통합하는 그녀만의 화법이라 할 수 있겠다.